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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호국산행(27km)10/16[등산갤러리]/중거리 산행기2010-10-18 10:00:07

대진세상 2023. 3. 22. 12:10

왜관 호국산행(27km)10/16

[등산갤러리]/중거리 산행기

2010-10-18 10:00:07

    전사(戰士 )의 魂

                        - "죽음으로 지켜라!"-

                낙동강 왜관 전투

       [개요]

  -6.25 60주년 기념 호국산행 제 3차 왜관전투지역-

  6·25 낙동강 전투의 최후 보루로서 꽃같은 생명이 처절하게 쓰러져 갔던 다부동,  그 격전의 현장을 지켜봐온

  팔공산, 황학산, 유학산, 소학산의 틈새에 앉아 있는 다부동고개는 일찌기 왕건과 견휜이 대권의 길목에서

  혈투를 벌인 요충지로서, 병자호란, 임진왜란, 6.25 등 치열한 전투를 겪은 곳이다.

  조선시대 이 고개는 문경새재를 거쳐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으로 많은 역과 관원, 행상인이 묵어가는

  주막촌이 형성되고 돈많은 거상들이 몰려들면서 부자가 많은 곳이라 하여 다부원(多富院)으로 이름이 바뀌
  었다 한다.

  유학산은 다부동을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데 839m의 정상에 올라서면 포(砲)로 대구시를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9차례의 고지 탈환전이 있었으며, 인근 석적면 포남리의 328고지(봉두암산)는

  무려 15번이나 고지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1950년 8월 낙동강방어선이 설치되고 왜관 전 주민의 소개령이 내렸으며,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들은 적 도하 방지를

  위해모두 폭파 되었는데 이 때 왜관 인도교  도 폭파 되었다.

  8월 16일 인민군 4만 여명이 집결해 대규모 도하작전을 벌이자 유엔군은 융단폭격을 퍼부어 적을 궤멸시켰는데

  왜관을 빼앗길 경우 대구뿐 아니라 부산까지 밀리게 될 것을 염려하여 필사적으로 왜관 일대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

  려 하였다.

 1.작오산 전투:작오산(303고지)는 1개 소대가 진지를 구축하여 결사 항전했던 곳이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소대 병력 45명이 북한에 의해 포로가 되었으며 이 중 40명이 학살됐다.

  2.유학산 황학산.소학산: 하늘이 그려낸 삼각형의 삼학 낙동강 전투 산악지역 다부동 전투지역이며 한국전쟁 최고의 격전지이다.

  3.숲데미산(수암산)전투:작오산과-소학산-유학산-수암산-328고지 낙동강 라인 최고의 산악 전투지역

 코스:왜관철교-작오산-기반산-요술이ㅡ고개-소학산-버등재-장현마을 -유학산-도봉사-팥재-수암산-석적면 26km

 

  산행출발전 왜관철교에서.(배병만.대진님.짱이님.악마님.태권브이님.)

    전쟁기간중 낙동강 전선 피.아 병력

    한국군 5개사단 37,700 

    미군 3개사단  36.900

    군예비 한미.9.600

    총 84.200명

  

   북한군 10개사단

   전차 1개 사단

    예비병력 10.000

   총79.100명 

    왜관 위령탑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와 석적읍 중지리에 걸쳐 있는 작오산(鵲烏山)의

   6.25전쟁 희생자와 항일 애국지사 추모비와 위령비, 기념탑이 있는 애국동산

 

    왜관 다부동전투

   한국군 제1사단. 미군제1기병사단

   북한군:제2군단.제3사단.제13.15사단

    전쟁기간 8월 2일- 9.16일

    교전지역: 칠곡 군위 선산

  

   작전지역: 수암산 (숲에미산).천생산.유학산,황학산.소학산.작오산.기반산.봉두암산

    이고지들은 대부분 기복이 아주 심한편

    낙동강 지역의 산들은 높지 않으나 기복이 심해 왜관- 대구간 주 보급로와 경부선 철도를 감시할수 있는

    중요한 전술적 중요성 지님. 

  충혼비 와 왜관철교

    6.25전쟁 낙동강 교전지역중 동부 산악지역을 지나게 될 들.날머리 선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교전 장소를 찾다보니

    유학산만 5번 올라 그곳을 지나게 되는 산들을 하나 하나 찾아 보게됩니다.

    다부동의 삼학(유학.황학.소학)과 작오산. 봉두암산. 그리고 숲데미산(작오산) 

   모두가 작지만  급 된비알의 높은산입니다. 전쟁기간중 치열했던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았던 선열들의 땀과 피

   하나 하나 지나게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후에 우리가 지나게 될길임을 생각합니다.  

   충혼비와 유엔 추모탑

     추모비는 6.25전쟁 당시 작오산 전투에서 숨진 미 1기병사단 장병과 국군 장병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들머리에서 작오산 가는길은 아주 좋고 조망도 그런데로..

 

   작오산 전몰 비석

  구미 금오산과 경부고속도로의 시원한 모습

 

   작오산 전투:작오산(303고지)는 1개 소대가 진지를 구축하여 결사 항전했던 곳이다.

   1950년 8월 5일부터 낙동강 전투가 시작되어 왜관 303고지를 기점으로
   남쪽으로는 미8군의 3개 사단이 방어하고 동북쪽으로는 한국군 5개 사단이 배치..

   왜관과 303고지의 방어는 미 제1기병사단에서 진지를 구축하여 결사 항전한 요새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1개 소대 병력 45명이 포로가 되어 40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작오산 정상부근

  멀리 황학산

 경부고속도로 칠곡 휴게소 뒷편

    마루금은 휴게소 때문에 옆으로

 대진님과 태권브이님 .

   휴식중 짱이님이 가지고 오신 족발과 오징어 찌짐으로 ...

 

  마루금은 군부대가 있어  휴양림 길로 이동 합니다

 들머리에서 기반산까지 등로는 아주 좋음

   증명사진 .

   소학산 바로 밑 요술의고개

 잠시 휴식중

소학산 올라가는 너덜길과 된비알..

    아주 죽여 줍니다.

  소학산 정상 .

이후 923 지방도까지 등로 아주 좋음

   황학마을과 황학산 전경

923번 지방도에서

멀리 소학산 과 버등재 가는길

  짐승도 안 다니는 길로 ..

  골병 들죠 .

 이렇게...

  장현고개에서

  구미의 일주님이 막걸리 몇병 가지고 휴학산 정상에 기다리고 계신다는 전갈입니다.

     그럼 빨리가야죠 .. 

  유학산 된비알

     마지막은 거의 네발로 기어 올라갑니다.

     전쟁기간에 이곳으로  군국이 올랐을걸 생각하니...

  좌측 황학산 우측은 소학산

유학에서 팔공으로 이어지는 마루금들

   다부동 전투 교전지역

  당시 각 연대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한번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에서 우리 1사단이 일보를 제출하지 않아 이를 규명하겠다고 현장 확인을 하러 나온 일이 있었다.

  중령을 반장으로 한 조사단이 사단사령부에 도착하자 사단에서는 15연대 전투 현장으로 안내했다.

  행정 규정을 따지는 그들에게 해당 작전지역 대대장은 “직접 가 보시면 안다”고만 말하고 270고지 위로 안내했다.

  그런데 고지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자 조사단은 아무 말 없이 되돌아갔다.

  그 후로는 육본에서 일보를 제출하라는 독촉이 없었다. 당시 사단의 각 연대에서는 신병이 도착하면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중대에 보충했다.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파악할 새가 없을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심지어 중대장과 소대장도 자기 부대의 현재 병력이 몇 명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룻밤 격전을 치르고 나면 총원의 30~40%가 손실되고, 다음날 또 신병으로 교체됐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분대원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몰 병사들을 무명용사로 일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 백선엽장군의 일화중 -

 

   

   유학산 정상을 배경으로

 

 황학과 소학

  일행을 기다리시는 일주님 감사합니다.

 

  날머리에서 올라오신 일주님

    일주님 덕분에 션한 막걸리 한발 합니다.

  

  유학산 최고봉 839고지

  

 정상에서 이어지는 가운데 지나갈길 숲데미산

  

   도봉사

 가운데 멀리 숲데미산

  도봉사에서 식수 보충

팥재 휴게소 그냥 지나치고 숲데미로 갑니다.

    등로는 아주 좋고  신나게 갑니다.

  치열산 교전을 한 숲데미산 근처로는 온통 유해 발굴지역 입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수천기는 될듯

    일주님 조자우로 모두 유해 발굴지대

    된비알 몇개 지나는 동안 좌우로는 모두 절벽수준의 된비알입니다.

    피.아간 교전중 절벽수준의 된비알로 올랐을 생각하니 아찔하고

 숲데미산 정상 에서

   이제 하산 합니다 .

   유학산과 봉두암산 과 더블어 치열한 교전장소

  어느 농가 마지막남은 까치밥

    까치밥 유래에 대해

   지금쯤 어디 가던 발갛게 익은 감이 감나무 끝에 몇 개씩 탐스럽게 달려 있다.

   그렇게 남아있는 감을 `까치밥'이라고 한다. 그 감들은 높아서 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까치의 밥으로 일부러 남겨놓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고시래' 풍속의 일종이다.

 고시래는 뭇 생물과 더불어 나누어 먹고자 한 생명사랑의 미풍양속이다.

   콩을 심을 때는 3알을 심었다. 하나만 심어도 될텐데 3알을 심은 뜻은 한 알은 새가 먹고,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에게 먹이기 위한 배려이다.

   등산가서 점심을 먹기 전에 무사한 산행(山行)을 위해 음식을 떼어 산신령에게 고시래한다.

   그런데 얼마 후에 보면 음식에 개미, 날파리 등이 잔뜩 붙어 있다. 남은 것은 배고픈 산짐승의 요깃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떠날 때 미투리와 짚신 등 2개의 신을 챙겨서 길을 떠났다. 평지의 길을 걸을 때는 미투리를 신고, 산길을 걸을 때는 짚신으로 바꾸어 신었다. 산에는 벌레들이 많이 살기에 그들이 밟혀 죽는 일이 없도록 성기게 짠 짚신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또 다래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그것으로 쿵쿵 땅을 울리며 길을 걸었다. 벌레들이 놀라 도망가게 함으로써 밟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정상적이고 훌륭한 아이를 잉태하고 낳기 위해서는 근신하고 조심하는데,

   그 가운데 임신부의 음식 금기는 지금과 달리 엄격하였다.

   곧 임신 중에 오리고기를 먹으면 손가락이 붙은 아이를 낳는다고 하여 금기로 여겼고,

  오징어나 문어를 먹으면 뼈 없는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꺼렸다.

   또 닭고기를 먹으면 닭살의 피부를 지닌 아이를 낳고, 토끼를 먹으면 눈이 빨간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꺼렸다.

  지금도 어촌에서는 임신부에게 생선을 잡거나 다루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생명을 탄생시키면서 다른 생명을 희생하는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행위를 꺼린 때문이었다.

 북애거사(北崖居士)가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고시래'의 유래가 나온다.

  단군조선시대에 고시씨(高矢氏)가 사람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배고픔을 면하였으므로 감사의 표시로 음식을 먹기 전에 미리 떼어내어 예(禮)를 올리고 그의 덕을 추모하였다.

  그래서 그 의식을 `고시례(高矢禮)'라고 하였으며, 후에 `고시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고시래 풍속은 불가(佛家)의 방생(放生)과 합하여져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인 `생명사랑'의 표상이 되었다.

 구미의 훈아님이 차량 지원을 오시고

  날머리 석적으로 이동 해서

   악마님이 준비한 멋진곳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겸 저녁식사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유학산과 낙동강 인근의 산들

   치열한 교전을 벌인 곳 모두 답사를 마치고 하나의 날머리를 완성 합니다

    이제 동해로 가서 들머리 확인하고 마루금따라 답사를 하면 내년 6.25. 전쟁 61주년에 맟춰 한번에 지나가면 됩니다.

  그동안 많은 지원을 해주신 구미분들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드리며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